테스형 ~
필라테스형에게 묻고 싶은 여러 가지들
우리 모두 한 번쯤 들어봤던 그 단어, 대기구 필라테스.
필라테스가 어떤 변천사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대기구 필라테스, 소도구 필라테스를 분류하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은 단순하게도 큰 기구 (리포머, 캐딜락 등)를 사용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나뉘는 것 같다. 누군지 몰라도 참으로 이름 하나 잘 짓지 않았나 싶다.
뭐 전통적으로도 큰 기구일수록 내 몸을 서포트해 주고 도움을 주는 것이라 들었다만, 혹자는 기구 필라테스라 하면 기구에 누우면 뭔가 다 해주는지 아는 사람도 있더라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다. 필라테스가 대유행을 거쳐오면서 정말 많은 회사가 필라테스 기구를 만들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고 그 와중에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소위 말하는 클래식 기구들을 요새는 다양하게, 예전보다 쉽게 만날 수 있다. 많은 스튜디오에서도 클래식 기구를 사용하고 조금 더 원론에 가까운 필라테스를 가르치기 위해 많이들 노력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최근 핫이슈인 나훈아의 테스형을 보며 어떠한 분야이든 어느 정도의 깊이에 들어서고 나면 삶과 철학과 함께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는데, “먼저가 본 그 길은 어떠하던가요.”라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 나 역시 필라테스형에게 무언가를 묻고 속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게 하루 이틀이었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더랬다. 기구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뭐 가능하다면 가능한 한 전통에 가깝게 접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유의 베이스에는 기구 자체가 나에게 주는 피드백뿐만 아니라, 내 신체의 일부 기관으로서의 감각적 지지, 그 이외에 (필라)테스형이 우리에게 남긴 다양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테스형이 만들어 놓은 그 기구만을 사용한다고 과연 우리는 테스형의 Work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질문은 늘 남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테스형이 남긴 유산을 또 다음 세대에게 그렇게 전파하고 있고 그 안에는 우리만의 해석이 묻어지면서 필요한 것들을 간혹 조금씩 변형하기도 하고 또는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알맞은 방법론으로 풀어나가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 해석이 자기중심적이어서는 안되고 환경과 본인 혹은 타인에게도 어떻게 투영하여 바라보고 적용되어 질 것이냐는 숙제는 늘 남는 것이다.
이 간단하고도 또 어려운 필라테스는 왜 내 세상에 들어와 나를 이리 괴롭히는가? 나름 몸땡이 철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또한 테스형에게 묻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다만, 코로나 팬더믹에 돌이켜보니 이 똑똑한 테스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인 시간은 진보와 동의어라는 명언을 남겼다지. 그래 진보하고 있소이다. 테스형은 과연 진보한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했을까?
형에게 묻고 싶은 몇 가지 중 또 하나는 왜 정해진 순서가 있나요? 인데 이 질문은 내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한데 그라면 과연 어떻게 대답했을까? 시간과 역사가 있는 움직임 메소드들의 특징들을 잘 살펴보면 어떠한 루트를 가지고 몸을 협응적이고 복합적으로 단련시키고 있는 구조체라는 형태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떠한 로직으로 만들어졌느냐는 것까지 알기에는 나는 너무 테스형을 늦게 알게 된 듯하다. 그래서 그의 Work를 가장 많이 접했던 가까운 선생님들께 레슨도 받아보고 얘기도 들어보다 보면 몸이 꼬여있던 목걸이 줄이 풀리는 술술 풀려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어찌 척추를 중력에 대입하느냐에 따라 그 형태와 모습이 변해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력에 대입하는 입으로부터 반중력의 힘을 스스로 얻기까지의 로드맵이라고나 할까? 어디까지나 이것 역시 나의 움직임에 기반한 경험에 의지한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몸을 가볍고 원활하게 쓴다는 말 자체가 반중력의 힘이 길러져서 최적화된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가 매트나 리포머를 순서대로 수행했을 때 느끼는 그 에너쟈틱함이란 그러한 순서대로 중력 대입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일 터이고 그 순서를 행하면서 길러낼 수 있는 스태미나나 지구력은 결국 비상시에 나를 견디게 하는 보조배터리로서, 우리가 얘기하는 면역력의 체계나 정신적인 원동력을 가지게 해주는 또 한 가지의 이점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이 클래식 필라테스를 사랑하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에너지를 소비(CONSUME)가 아니라 생산(INVIGORATE)해 내는 그 짜릿함이란 정말 어떠한 것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테스형의 Work의 고마움을 요즘 더 느끼고 있는 것이 바로, 방구석 필라테스를 하며 하루하루 팬더믹을 견디고 있는 많은 필라테스인을 보면서이다. 우리는 에너지 생산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태블릿을 키고 자립적인 또한 어떠한 면에서 약간의 의존적인 줌 클래스 등으로 하루하루 그 즐거움을 또한 찾고 있지 않나. 매트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는 요즈음이다. 막상 한번 올라가서 기나긴 시리즈의 리포머를 하기 싫을 때도 많지만 그 리포머가 벌써 그립기도 하다.
오늘 저녁은 방구석리포머 시리즈를 해 보아야 겠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하였던가~ 집 안에 있는 수건으로 공으로 매트로 혹은 소파나 침대까지…. 어떠한 방법이 되었던 우리가 ‘몸땡이 철학’을 하며 이해할 수 있었던 그의 ‘웍’을 조금 더 본질적으로 기구 없이도 대입할 수 있다면 내가 애증 하는 그 리포머로 다시 돌아갔을 때 조금 더 그 이유와 원리를 깊이 있는 방향으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록으로 설명으로 제대로는 남아있지도 않은 테스형의 리포머 사진들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에 빠져본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을 주려 했던 것일까?
writtend by Kyung Hye, Sinclair
테스형 ~
필라테스형에게 묻고 싶은 여러 가지들
우리 모두 한 번쯤 들어봤던 그 단어, 대기구 필라테스.
필라테스가 어떤 변천사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대기구 필라테스, 소도구 필라테스를 분류하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은 단순하게도 큰 기구 (리포머, 캐딜락 등)를 사용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나뉘는 것 같다. 누군지 몰라도 참으로 이름 하나 잘 짓지 않았나 싶다.
뭐 전통적으로도 큰 기구일수록 내 몸을 서포트해 주고 도움을 주는 것이라 들었다만, 혹자는 기구 필라테스라 하면 기구에 누우면 뭔가 다 해주는지 아는 사람도 있더라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다. 필라테스가 대유행을 거쳐오면서 정말 많은 회사가 필라테스 기구를 만들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고 그 와중에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소위 말하는 클래식 기구들을 요새는 다양하게, 예전보다 쉽게 만날 수 있다. 많은 스튜디오에서도 클래식 기구를 사용하고 조금 더 원론에 가까운 필라테스를 가르치기 위해 많이들 노력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최근 핫이슈인 나훈아의 테스형을 보며 어떠한 분야이든 어느 정도의 깊이에 들어서고 나면 삶과 철학과 함께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는데, “먼저가 본 그 길은 어떠하던가요.”라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 나 역시 필라테스형에게 무언가를 묻고 속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게 하루 이틀이었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더랬다. 기구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뭐 가능하다면 가능한 한 전통에 가깝게 접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유의 베이스에는 기구 자체가 나에게 주는 피드백뿐만 아니라, 내 신체의 일부 기관으로서의 감각적 지지, 그 이외에 (필라)테스형이 우리에게 남긴 다양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테스형이 만들어 놓은 그 기구만을 사용한다고 과연 우리는 테스형의 Work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질문은 늘 남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테스형이 남긴 유산을 또 다음 세대에게 그렇게 전파하고 있고 그 안에는 우리만의 해석이 묻어지면서 필요한 것들을 간혹 조금씩 변형하기도 하고 또는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알맞은 방법론으로 풀어나가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 해석이 자기중심적이어서는 안되고 환경과 본인 혹은 타인에게도 어떻게 투영하여 바라보고 적용되어 질 것이냐는 숙제는 늘 남는 것이다.
이 간단하고도 또 어려운 필라테스는 왜 내 세상에 들어와 나를 이리 괴롭히는가? 나름 몸땡이 철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또한 테스형에게 묻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다만, 코로나 팬더믹에 돌이켜보니 이 똑똑한 테스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인 시간은 진보와 동의어라는 명언을 남겼다지. 그래 진보하고 있소이다. 테스형은 과연 진보한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했을까?
형에게 묻고 싶은 몇 가지 중 또 하나는 왜 정해진 순서가 있나요? 인데 이 질문은 내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한데 그라면 과연 어떻게 대답했을까? 시간과 역사가 있는 움직임 메소드들의 특징들을 잘 살펴보면 어떠한 루트를 가지고 몸을 협응적이고 복합적으로 단련시키고 있는 구조체라는 형태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떠한 로직으로 만들어졌느냐는 것까지 알기에는 나는 너무 테스형을 늦게 알게 된 듯하다. 그래서 그의 Work를 가장 많이 접했던 가까운 선생님들께 레슨도 받아보고 얘기도 들어보다 보면 몸이 꼬여있던 목걸이 줄이 풀리는 술술 풀려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어찌 척추를 중력에 대입하느냐에 따라 그 형태와 모습이 변해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력에 대입하는 입으로부터 반중력의 힘을 스스로 얻기까지의 로드맵이라고나 할까? 어디까지나 이것 역시 나의 움직임에 기반한 경험에 의지한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몸을 가볍고 원활하게 쓴다는 말 자체가 반중력의 힘이 길러져서 최적화된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가 매트나 리포머를 순서대로 수행했을 때 느끼는 그 에너쟈틱함이란 그러한 순서대로 중력 대입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일 터이고 그 순서를 행하면서 길러낼 수 있는 스태미나나 지구력은 결국 비상시에 나를 견디게 하는 보조배터리로서, 우리가 얘기하는 면역력의 체계나 정신적인 원동력을 가지게 해주는 또 한 가지의 이점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이 클래식 필라테스를 사랑하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에너지를 소비(CONSUME)가 아니라 생산(INVIGORATE)해 내는 그 짜릿함이란 정말 어떠한 것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테스형의 Work의 고마움을 요즘 더 느끼고 있는 것이 바로, 방구석 필라테스를 하며 하루하루 팬더믹을 견디고 있는 많은 필라테스인을 보면서이다. 우리는 에너지 생산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태블릿을 키고 자립적인 또한 어떠한 면에서 약간의 의존적인 줌 클래스 등으로 하루하루 그 즐거움을 또한 찾고 있지 않나. 매트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는 요즈음이다. 막상 한번 올라가서 기나긴 시리즈의 리포머를 하기 싫을 때도 많지만 그 리포머가 벌써 그립기도 하다.
오늘 저녁은 방구석리포머 시리즈를 해 보아야 겠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하였던가~ 집 안에 있는 수건으로 공으로 매트로 혹은 소파나 침대까지…. 어떠한 방법이 되었던 우리가 ‘몸땡이 철학’을 하며 이해할 수 있었던 그의 ‘웍’을 조금 더 본질적으로 기구 없이도 대입할 수 있다면 내가 애증 하는 그 리포머로 다시 돌아갔을 때 조금 더 그 이유와 원리를 깊이 있는 방향으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록으로 설명으로 제대로는 남아있지도 않은 테스형의 리포머 사진들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에 빠져본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을 주려 했던 것일까?
writtend by Kyung Hye, Sincl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