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업의 아름다운 자태 ,그 고고함에 대하여
우리가 운동할 때, 무엇이 그리고 신경 쓰고 내 인지에 넣어야 할 것들이 많고도 많은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해달라는 의미로서의 풀업~!
뭐 들어 올리고 내리는 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너와 내가 다르게 생기었듯이 우리의 들어 올리고 내림의 이해 또한 다를 터… 목적어를 그냥 무시하고… 풀업하세요~!
두말 필요 없이 풀업하세요 ~! 가 많은 것들을 해결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신비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 우리는 필라테스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을 주로 중독이라 부른다. 그 중독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힘듦(고통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기에)과 희열이 존재하므로 이것이야말로 하면 안 될 행동을 계속 몰래 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몰래 해내고 나면 뿌듯한 나만 아는 그것을 즐기고 싶은 자기만의 방이 있었지 않았던가?
사실 이런 종류의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특징은 본인을 너무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지극히 외로우며 혼자 있음을 또 즐기고, 고통을 즐기는 조금은 변태적인 ㅋㅋ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희열이 마약보다 짙다 하여 절대 끊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존재한다.
어찌 보면 반중력의 에너지를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 풀업이고 안타깝게도 중력은 나를 계속 부르기에 그 풀업의 노력은 사실 쉼 없이 계속되어야만 할 터..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앞선 글에서 조화로운 에너지와 힘의 분배에 대한 부분에 대한 나의 의견이 조금은 받아들이기 수월해질 것이다. 끊임없는 중력에 대항하는 힘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 힘이나 특정 근육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고 반중력에 대입이 될 수 있는 환경으로 들어가서 숨 쉬고 노래하는 듯한 가벼운 에너지, 하지만 인지된 에너지로서 동반되어야 함이 틀림없다.
풀업의 고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외면적인 아름다움에도 대입이 되는데 이 풀업이란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바닥을 향했던 근육들이 내 몸의 센터 가까이 쭈욱 끌어올라 오면서 관절이 최대한으로 열린 (여기서 내가 얘기하는 열림이란 근육이 등척성 수축으로 인해 관절에 공간을 확보한 상태이지 관절이 말 그대로 벌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태가 된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일종의 관절의 성형 효과로 인한 가늘고 매끄러운 상태가 되는데 살짝 빨대로 빨아드린 느낌이라고나 할까, 거울로 잘 바라보게 되면 관절 공들이 공평하게 열리면서 근육의 몰림 현상 없이 매끈하게 자리 잡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본인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체형을 우아하게 뽐낼 수 있게 된다.
필라테스를 하는 많은 이유 중의 하나인 “코어를 단단하게”의 의미에 대해서 앞선 글에서 언급한바 이미 있고, 또 다른 일반적인 needs에는 외형적인 만족을 위해 행해지는 경우도 많은데 소위 말하는 에스라인이니 애플힙이니 하는 것들의 근본적 효과가 사실이 풀업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관절이 제자리를 찾고 벌어져 있는 뼈가 모이고 처져 있던 근육들이 끌어 올려지면서 반중력에 대입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되면 결국 보기 좋은 체형, 통증을 유발하지 않는 바른 자세 (테스형이 언급한 빌딩 블록 이론처럼)로 단단하고 강한, 하지만 유려한 구조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 몸은 큰 근육들의 작용을 조금씩 배제하고 관절 가까이 붙어 있는 작은 아이들을 동원 시키게 되는데 그렇게 움직임을 하게 되면 움직임 자체가 더 거칠지 않고 부드러우며 근육과 관절 인대 근막들이 조화롭게 작용하여 보다 가동성의 범위를 늘려 그 동작 자체가 우아하고 고고함을 가진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우아하기는 힘든 일인 것이지)
결국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원근법으로 관찰하여 움직임을 보게 되는 것이고 실제 움직임을 실현해 낼 때는 이 풀업을 이해하고 찾으려 하면 조금 더 심플해지게 되는 미니멀리즘의 미학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그래서 보고 따라 하기가 무서운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각적인 배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자극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사실 아이들이 무언가 행동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잘 관찰해보면 엄마 아빠의 행동을 단순히 copy 하는 과정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미 사고가 성숙한 어른이기 때문에 분명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는 데 있어 관점이 있게 마련이고,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다소 짙을 수 있어서 감각적 훈련으로 풀업의 organic적은 효과를 기대한다면 사실 보고 하는 훈련보다는 본인의 몰입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는 풀업의 가장 아름다운 고고함은 또한 그 몰입의 경지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찾기란 워낙에 힘들지만, 그것을 지속해서 늘 같은 형태로 같은 양으로 조절(control)하는 것은 또 다른 레벨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발견할 때는 주로 고수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되는데 주변에 아무리 어떠한 환경의 변화나 조건적인 변화가 생겨도 이를 찾고 지속할 수 있는, 혼연일체되어 풀업 된 인지와-반인지가 공존한 그 상태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또 다른 레벨 위에 있게 된 고수들을 만날 때 그 고고하고 아름다움이란 어떠한 단어로도 대체되지 않는 것이기에 더는 설명하지 않겠다.
백조가 물 위에서 고고하게 움직이지만, 물밑에서 얼마나 거친 발길질을 하며 물 위에 거니는지, 가끔은 우리가 수련 중에 혹은 인생에서 더 힘든 장면을 만날 때마다 우아하고 고고하게 웃으며 대처하는 그런 노련함을 우리는 또 풀업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끌어올릴 호흡이 남아있지 않을 때, 더 이상의 lifting이 되지 않을 것 같을 때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웃으면서 조금 더 풀업하자.~! 그 희열이란 가보지 않은 자는 절대 모를 다른 세상이기에 자꾸자꾸 또 하고 싶은 그것이 나에게는 그 풀업 찾기인 것이다.
5일째 여러 가지 관점에서 내가 칼럼을 쓰면서 조셉 필라테스의 저서에서 혹은 그의 웍을 받아 들이면서 느낀 나의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을 하고 있다. 비록 모두가 공감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지향하는 점과 이유가 각자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충분히 이미 괜찮지 않은가? 산은 산일 뿐이지 않겠는가? 저 산봉우리 정상에 올라서 메아리치는 소리를 이쪽 정상에서 들었을 때 미소로 화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나의 글이 그렇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written by Kyung Hye, Sinclair
풀업의 아름다운 자태 ,그 고고함에 대하여
우리가 운동할 때, 무엇이 그리고 신경 쓰고 내 인지에 넣어야 할 것들이 많고도 많은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해달라는 의미로서의 풀업~!
뭐 들어 올리고 내리는 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너와 내가 다르게 생기었듯이 우리의 들어 올리고 내림의 이해 또한 다를 터… 목적어를 그냥 무시하고… 풀업하세요~!
두말 필요 없이 풀업하세요 ~! 가 많은 것들을 해결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신비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 우리는 필라테스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을 주로 중독이라 부른다. 그 중독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힘듦(고통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기에)과 희열이 존재하므로 이것이야말로 하면 안 될 행동을 계속 몰래 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몰래 해내고 나면 뿌듯한 나만 아는 그것을 즐기고 싶은 자기만의 방이 있었지 않았던가?
사실 이런 종류의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특징은 본인을 너무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지극히 외로우며 혼자 있음을 또 즐기고, 고통을 즐기는 조금은 변태적인 ㅋㅋ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희열이 마약보다 짙다 하여 절대 끊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존재한다.
어찌 보면 반중력의 에너지를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 풀업이고 안타깝게도 중력은 나를 계속 부르기에 그 풀업의 노력은 사실 쉼 없이 계속되어야만 할 터..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앞선 글에서 조화로운 에너지와 힘의 분배에 대한 부분에 대한 나의 의견이 조금은 받아들이기 수월해질 것이다. 끊임없는 중력에 대항하는 힘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 힘이나 특정 근육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고 반중력에 대입이 될 수 있는 환경으로 들어가서 숨 쉬고 노래하는 듯한 가벼운 에너지, 하지만 인지된 에너지로서 동반되어야 함이 틀림없다.
풀업의 고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외면적인 아름다움에도 대입이 되는데 이 풀업이란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바닥을 향했던 근육들이 내 몸의 센터 가까이 쭈욱 끌어올라 오면서 관절이 최대한으로 열린 (여기서 내가 얘기하는 열림이란 근육이 등척성 수축으로 인해 관절에 공간을 확보한 상태이지 관절이 말 그대로 벌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태가 된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일종의 관절의 성형 효과로 인한 가늘고 매끄러운 상태가 되는데 살짝 빨대로 빨아드린 느낌이라고나 할까, 거울로 잘 바라보게 되면 관절 공들이 공평하게 열리면서 근육의 몰림 현상 없이 매끈하게 자리 잡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본인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체형을 우아하게 뽐낼 수 있게 된다.
필라테스를 하는 많은 이유 중의 하나인 “코어를 단단하게”의 의미에 대해서 앞선 글에서 언급한바 이미 있고, 또 다른 일반적인 needs에는 외형적인 만족을 위해 행해지는 경우도 많은데 소위 말하는 에스라인이니 애플힙이니 하는 것들의 근본적 효과가 사실이 풀업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관절이 제자리를 찾고 벌어져 있는 뼈가 모이고 처져 있던 근육들이 끌어 올려지면서 반중력에 대입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되면 결국 보기 좋은 체형, 통증을 유발하지 않는 바른 자세 (테스형이 언급한 빌딩 블록 이론처럼)로 단단하고 강한, 하지만 유려한 구조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 몸은 큰 근육들의 작용을 조금씩 배제하고 관절 가까이 붙어 있는 작은 아이들을 동원 시키게 되는데 그렇게 움직임을 하게 되면 움직임 자체가 더 거칠지 않고 부드러우며 근육과 관절 인대 근막들이 조화롭게 작용하여 보다 가동성의 범위를 늘려 그 동작 자체가 우아하고 고고함을 가진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우아하기는 힘든 일인 것이지)
결국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원근법으로 관찰하여 움직임을 보게 되는 것이고 실제 움직임을 실현해 낼 때는 이 풀업을 이해하고 찾으려 하면 조금 더 심플해지게 되는 미니멀리즘의 미학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그래서 보고 따라 하기가 무서운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각적인 배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자극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사실 아이들이 무언가 행동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잘 관찰해보면 엄마 아빠의 행동을 단순히 copy 하는 과정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미 사고가 성숙한 어른이기 때문에 분명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는 데 있어 관점이 있게 마련이고,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다소 짙을 수 있어서 감각적 훈련으로 풀업의 organic적은 효과를 기대한다면 사실 보고 하는 훈련보다는 본인의 몰입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는 풀업의 가장 아름다운 고고함은 또한 그 몰입의 경지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찾기란 워낙에 힘들지만, 그것을 지속해서 늘 같은 형태로 같은 양으로 조절(control)하는 것은 또 다른 레벨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발견할 때는 주로 고수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되는데 주변에 아무리 어떠한 환경의 변화나 조건적인 변화가 생겨도 이를 찾고 지속할 수 있는, 혼연일체되어 풀업 된 인지와-반인지가 공존한 그 상태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또 다른 레벨 위에 있게 된 고수들을 만날 때 그 고고하고 아름다움이란 어떠한 단어로도 대체되지 않는 것이기에 더는 설명하지 않겠다.
백조가 물 위에서 고고하게 움직이지만, 물밑에서 얼마나 거친 발길질을 하며 물 위에 거니는지, 가끔은 우리가 수련 중에 혹은 인생에서 더 힘든 장면을 만날 때마다 우아하고 고고하게 웃으며 대처하는 그런 노련함을 우리는 또 풀업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끌어올릴 호흡이 남아있지 않을 때, 더 이상의 lifting이 되지 않을 것 같을 때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웃으면서 조금 더 풀업하자.~! 그 희열이란 가보지 않은 자는 절대 모를 다른 세상이기에 자꾸자꾸 또 하고 싶은 그것이 나에게는 그 풀업 찾기인 것이다.
5일째 여러 가지 관점에서 내가 칼럼을 쓰면서 조셉 필라테스의 저서에서 혹은 그의 웍을 받아 들이면서 느낀 나의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을 하고 있다. 비록 모두가 공감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지향하는 점과 이유가 각자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충분히 이미 괜찮지 않은가? 산은 산일 뿐이지 않겠는가? 저 산봉우리 정상에 올라서 메아리치는 소리를 이쪽 정상에서 들었을 때 미소로 화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나의 글이 그렇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written by Kyung Hye, Sincl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