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us, pilates people 09.
About beauty of control
조절의 아름다움이란
서울에 스튜디오를 오픈 하고 왔다 갔다 2024년을 바쁘게도 보내었는데 안타깝게도 매달 에세이를 써보겠다는 나의 야심찬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코로나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형으로 to us pilates people을 연재해 나가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에 대해 가장 큰 점수를 주는 나로서는 다시 컴퓨터 앞에 나 스스로를 앉혀서 글을 쓰게 하는 일 자체는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반복속에서 지겨움 속에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속에서 스스로에게 영감을 얻어내고 화려하지 않은 깨달음을 찾아가며 현재 진행 발전형이 된다는 것 오히려 그것은 더 어렵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누구나 주어진 task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어려움이 아니겠지만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생명을 불어넣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나를 갈고 닦는 일은 다시 한번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만들어 낸다.
처음에 클래식 필라테스가 오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꽤나 심플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성실하게 그런 오더들을 가르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고전이 왜 좋은 것인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 총명하고 밝던 시절을 지나 모든 오더를 알아버리고 나니 왜 우리는 이런 오더를 이해하고 수행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되었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그 오더를 해내던 시절이 오히려 컨트롤이라는 나만의 세계의 명목 하에 정답지에 끼워 맞추듯 운동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물론 그런 시절을 지나왔기에 지금은 컨트롤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제어하거나 가두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절대 불변의 법칙으로서 오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고전이 왜 더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지를 알게 되기도 하였다.
30대의 나의 필라테스는 좀더 명확함과 정확함 그리고 어찌 보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하고 싶어 하던 배고픈 시절 이였고, 그 정의를 내려줄 누군가를 찾아 다니면서 배고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태풍에 맞서라면 맞설 수 있을 것 같은 베짱이 있었고 체력이 있었고 그 열정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흑백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지금 40대의 나의 필라테스는 정착기가 아닌 끊임없는 수용기에 진입 된 상태가 되어 있다. 나와 나의 필라테스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 반복된 오더를 통해 매일 변화되는 나를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나에게 주는 깨달음이 이제는 컨트롤로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그런 간단하고 심오한 깊은 원리가 이 메소드 안에 숨어있었다는 걸 모르고 죽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안타깝게도 컨트롤이라는 것을 한국말로 정의해보면 왠지 영어 자체가 주고자 하는 그 단어의 의미가 상쇄되는 느낌이라 통제하고 조절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하고 있는 컨트롤로지에서 적합한 단어는 아니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마음먹은 대로 공을 던지는 것을 절묘한 컨트롤 이라고 표현하는데, 잘못 해석하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마음 먹은 대로 던질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만들어 낸다는 느낌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결국 변화되는 타자들과 경기속의 흥미진진한 상황들, 투수 스스로의 마음의 불안과 견제, 그리고 금치 못할 흥분감과 압박, 관객들의 응원과 비난까지... 그런 상황들 속을 끊임없이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컨트롤의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는 수용과 수정은 어떠한 종목에도 상관없이 발전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고 우리의 필라테스가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컨트롤로지스트로서 이 메소드를 통해 제어와 통제가 아닌 모든 모습을 받아들이며 계속적인 수용을 해 나가기 때문이다. 계속적인 수정, 그리고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들에 대한 수용능력이야 말로 내 자신의 심오한 세계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또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커뮤니케이터로서 우리를 필라테스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성장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by KHS
To us, pilates people 09.
About beauty of control
조절의 아름다움이란
서울에 스튜디오를 오픈 하고 왔다 갔다 2024년을 바쁘게도 보내었는데 안타깝게도 매달 에세이를 써보겠다는 나의 야심찬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코로나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형으로 to us pilates people을 연재해 나가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에 대해 가장 큰 점수를 주는 나로서는 다시 컴퓨터 앞에 나 스스로를 앉혀서 글을 쓰게 하는 일 자체는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반복속에서 지겨움 속에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속에서 스스로에게 영감을 얻어내고 화려하지 않은 깨달음을 찾아가며 현재 진행 발전형이 된다는 것 오히려 그것은 더 어렵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누구나 주어진 task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어려움이 아니겠지만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생명을 불어넣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나를 갈고 닦는 일은 다시 한번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만들어 낸다.
처음에 클래식 필라테스가 오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꽤나 심플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성실하게 그런 오더들을 가르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고전이 왜 좋은 것인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 총명하고 밝던 시절을 지나 모든 오더를 알아버리고 나니 왜 우리는 이런 오더를 이해하고 수행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되었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그 오더를 해내던 시절이 오히려 컨트롤이라는 나만의 세계의 명목 하에 정답지에 끼워 맞추듯 운동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물론 그런 시절을 지나왔기에 지금은 컨트롤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제어하거나 가두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절대 불변의 법칙으로서 오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고전이 왜 더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지를 알게 되기도 하였다.
30대의 나의 필라테스는 좀더 명확함과 정확함 그리고 어찌 보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하고 싶어 하던 배고픈 시절 이였고, 그 정의를 내려줄 누군가를 찾아 다니면서 배고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태풍에 맞서라면 맞설 수 있을 것 같은 베짱이 있었고 체력이 있었고 그 열정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흑백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지금 40대의 나의 필라테스는 정착기가 아닌 끊임없는 수용기에 진입 된 상태가 되어 있다. 나와 나의 필라테스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 반복된 오더를 통해 매일 변화되는 나를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나에게 주는 깨달음이 이제는 컨트롤로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그런 간단하고 심오한 깊은 원리가 이 메소드 안에 숨어있었다는 걸 모르고 죽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안타깝게도 컨트롤이라는 것을 한국말로 정의해보면 왠지 영어 자체가 주고자 하는 그 단어의 의미가 상쇄되는 느낌이라 통제하고 조절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하고 있는 컨트롤로지에서 적합한 단어는 아니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마음먹은 대로 공을 던지는 것을 절묘한 컨트롤 이라고 표현하는데, 잘못 해석하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마음 먹은 대로 던질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만들어 낸다는 느낌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결국 변화되는 타자들과 경기속의 흥미진진한 상황들, 투수 스스로의 마음의 불안과 견제, 그리고 금치 못할 흥분감과 압박, 관객들의 응원과 비난까지... 그런 상황들 속을 끊임없이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컨트롤의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는 수용과 수정은 어떠한 종목에도 상관없이 발전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고 우리의 필라테스가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컨트롤로지스트로서 이 메소드를 통해 제어와 통제가 아닌 모든 모습을 받아들이며 계속적인 수용을 해 나가기 때문이다. 계속적인 수정, 그리고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들에 대한 수용능력이야 말로 내 자신의 심오한 세계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또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커뮤니케이터로서 우리를 필라테스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성장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by K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