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교육과 레슨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면서 강사의 길을 닦아간다. 물론, 스스로 지식의 욕구를 충족하거나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내가 만난 많은 필라테스 강사들은 대체로 그러하였다.
결국 배움을 통한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수많은 실수의 반복을 통해 오류를 거치고 수정하며, 앎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 수많은 반복 속에 무엇으로 자신의 만족을 채워가는지는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급변하는 세상에서 클래식이라는 장르의 모든 것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든지, 배움의 궁극적 목적이나 이유를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 느껴진다.
전문가가 되는 일련의 과정은 동작을 마스터링하고, 시스템을 이해하고, 연습→고찰→수련→고찰→실전→티칭을 통한 지식의 확인 등의 단계로 한 계단씩 마스터해 나간다. 처음에는 그 계단의 높이가 조금은 낮고 빠르게 올라갈 수 있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계단 자체의 높이가 버거워지고 한 계단을 올라가는 자체가 힘겨워 진다는 걸 느낄 것이다.
어쩌면 배움이라 하는 것이 그런 것일까~ 나의 지식이 깊어질수록 나의 사고가 깊어질수록 그것에 대한 표출이나 질문의 양상이 심플하지만 깊고 심오해져서 발전의 속도가 더딘 듯 느끼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쉽게 시작하기는 하지만 계속해나가는 건 무척 희박한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너무나 뛰어난 학생들(clients)이 많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나의 세상을 펼칠 기회가 되어 지금까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8년을 꼬박 정말 매일 같이 클라이언트를 티칭해 왔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나의 스승이 되어 주는 클라이언트를 보면서 나라는 존재는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고, 몸에 대해 탐험을 해나가는 탐험가로서 분명 수많은 실수를 하고 오류를 범했겠지만, 그 자체의 의도는 순수하고 맑은 이유기에 같이 성장해나가는 클라이언트나 학생들이 발전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좋게 봐주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나에게는 참으로 많은 선생님이 있었고 나는 늘 선생님을 찾아 헤매는 배움에 고픈 학생이었지만, 안타깝게 내게는 선생님이라 모실만한 정서적인 안정을 주는 분은 없었다.
조금 더 어린 시절에 그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더라면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날개가 되었겠지만, 내게 선생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지식의 풍요로움의 의미 이상이었던 것 같다. 정서적인 안정뿐 아니라 내 삶의 한 길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스승을 바라고 있지 않았나 싶다.
조금은 동양적인 사상의 영향일까, 성인이 되고 서구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 문화를 접해보니 내가 어른이 되어 만난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토를 가진 분들이었다.
특유의 독립적인 사상이 어떨 때는 정서적으로 나를 외롭게 만들어나가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살면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혼자 사투를 벌이는 형태이고, 생각해보면 어떤 선생님이든 내게 그러한 사투의 시간을 가지게 했던 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필라테스를 가르치면서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고 간혹 나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간혹 스스로 질문해보게 되는데 과연 내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것에 대해서였다.
많은 교육 현장에 계시는 분들을 보며 나름 느끼고 배운 것들도 많지만, 내가 가르치고 있는 이것은 학문이라 하기엔 다소 부족할 수도 있고, 어떠한 형태로 집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는 트레이너, 인스트럭터, 티처라는 다양한 의미로서 각자가 정의하고 있는 모습을 실현하며 살아나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그 가르침의 현장에서 우리는 학생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는 또 하나의 학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선생님 중 한 분은 티처와 인스트럭터를 이렇게 구분하셨는데, 문을 열고 나갈 때 무언가를 가지고 나가게 해주는 것이 티처라고, 인스트럭터라고 하는 것을 말 그대로 인스트럭션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한동안 그 의미가 많은 모티브가 되어 늘 한가지의 가르침을, 한가지의 무언가를 주기 위해 노력했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프로세스 자체가 매시간 나를 더 강하고 생각하는 선생님으로 만들었더랬다. 어찌 보면 그 과정 자체가 배움의 과정이었고 매시간 티칭을 하는 시간이 결국 수련이 시간이었다는 것을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오히려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 더 성심을 다한 한 시간, (혹은 몇 시간 씩)을 보내려 한다. 채우기보다 비우는 티칭을 선호하고, 주입식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티칭해 나가려고 노력한다.
이전에는 필라테스를 이렇게 라고 내 나름대로 정의하고 판단해서 이건 이렇게였다면, 지금은 이것도 저것도 괜찮지만, 그 선택의 결론에 회원 스스로 생각하는 프로세스가 꼭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원에게 생각의 프로세스가 보인다면, 나는 나의 티칭을 다시 reflection하고 그 자체가 성찰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게 조금 더 내가 지향하는 티칭이고 당장은 1~10까지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facilitator로서 어쩌면 마라톤을 같이 뛰어주는 조력자로서 함께 하고 싶다는 나의 교육철학이 확고해 진 것이다.
결국 이런 나의 철학은 손님을 가르칠 때나 선생님을 양성할 때도 마찬가지가 되었고, 그런 내 방법이 혹자에게는 느린 걸음처럼 느껴져 떠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오늘 이 자리까지 나와 함께 발걸음을 하는 제자도 남아있다.
나의 또 다른 선생님 중 한 분께서 본인의 가장 애제자는 지금 현재 옆에 남아 있는 제자라고 하였던 지나간 기억이 떠오른다. 너무나 맞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 그 선생님도 참 외로운, 누군가에게 주는 삶을 오랫동안 살고 계셨던 게 아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게 되는 전제조건 중의 하나가 본인 스스로가 변화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실행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기부여와 나의 노력이 만날 때 그 결과가 빚어서 나오게 된다. 어찌 보면 그 동기부여가 내가 가진 능력보다 훨씬 중요하고 그것을 실행해 내는 행동력을 보게 될 때 기적적인 결과도 간혹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무언가를 가르치고 누군가에게 영감 혹은 귀감이 되고, 나의 개똥철학을 읊어도 하나부터 열까지 받아줄 수 있는 제자가 있다는 건 참으로 복 받은 일이다. 그들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한 번 더 움직이고 한 번 더 배우고 읽고 읊조리며 긴장을 놓지 않는 꾸준한 인생을 찾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조절하는 조절력도 가지게 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사이 교육이나 우리가 하는 일이 너무나 서비스 형태를 띄고 있어서 과연 어떠한 철학을 읊조리는 것 자체, 기본적인 예의와 관계에 대해 코멘트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고리타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진정한 배움이란 내가 가진 태도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배운 걸 써먹을 일이지 적어도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를 확인 받으려고 질문하지 않고, 배움 그 자체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알고 있던 확인 하고 싶었던 답을 얻었다면 주저할지 말고 나아갈 것이요, 그 확신을 두텁게 하기 위해 계속 연습하는데 매진할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배움이라는 것을 했다고 한다면 이미 답은 알고 있을 노릇이니 그걸 실천해 나가는데 좋은 스승이 곁에 있어준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축복된 일이기에, 그 고픔이 나에게는 적어도 너무 크기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을 오늘 글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밤, 더 주고 싶어도 못 주었던 제자들에게, 늘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많은 클라이언트들에게 또 많은 스승님께, 항상 동기부여가 되어주는 많은 친구, 지금 이 글을 감수해서 올려주는 나의 no.1 에게도 오늘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written by Kyung Hye, Sinclair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교육과 레슨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면서 강사의 길을 닦아간다. 물론, 스스로 지식의 욕구를 충족하거나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내가 만난 많은 필라테스 강사들은 대체로 그러하였다.
결국 배움을 통한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수많은 실수의 반복을 통해 오류를 거치고 수정하며, 앎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 수많은 반복 속에 무엇으로 자신의 만족을 채워가는지는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급변하는 세상에서 클래식이라는 장르의 모든 것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든지, 배움의 궁극적 목적이나 이유를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 느껴진다.
전문가가 되는 일련의 과정은 동작을 마스터링하고, 시스템을 이해하고, 연습→고찰→수련→고찰→실전→티칭을 통한 지식의 확인 등의 단계로 한 계단씩 마스터해 나간다. 처음에는 그 계단의 높이가 조금은 낮고 빠르게 올라갈 수 있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계단 자체의 높이가 버거워지고 한 계단을 올라가는 자체가 힘겨워 진다는 걸 느낄 것이다.
어쩌면 배움이라 하는 것이 그런 것일까~ 나의 지식이 깊어질수록 나의 사고가 깊어질수록 그것에 대한 표출이나 질문의 양상이 심플하지만 깊고 심오해져서 발전의 속도가 더딘 듯 느끼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쉽게 시작하기는 하지만 계속해나가는 건 무척 희박한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너무나 뛰어난 학생들(clients)이 많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나의 세상을 펼칠 기회가 되어 지금까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8년을 꼬박 정말 매일 같이 클라이언트를 티칭해 왔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나의 스승이 되어 주는 클라이언트를 보면서 나라는 존재는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고, 몸에 대해 탐험을 해나가는 탐험가로서 분명 수많은 실수를 하고 오류를 범했겠지만, 그 자체의 의도는 순수하고 맑은 이유기에 같이 성장해나가는 클라이언트나 학생들이 발전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좋게 봐주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나에게는 참으로 많은 선생님이 있었고 나는 늘 선생님을 찾아 헤매는 배움에 고픈 학생이었지만, 안타깝게 내게는 선생님이라 모실만한 정서적인 안정을 주는 분은 없었다.
조금 더 어린 시절에 그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더라면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날개가 되었겠지만, 내게 선생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지식의 풍요로움의 의미 이상이었던 것 같다. 정서적인 안정뿐 아니라 내 삶의 한 길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스승을 바라고 있지 않았나 싶다.
조금은 동양적인 사상의 영향일까, 성인이 되고 서구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 문화를 접해보니 내가 어른이 되어 만난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토를 가진 분들이었다.
특유의 독립적인 사상이 어떨 때는 정서적으로 나를 외롭게 만들어나가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살면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혼자 사투를 벌이는 형태이고, 생각해보면 어떤 선생님이든 내게 그러한 사투의 시간을 가지게 했던 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필라테스를 가르치면서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고 간혹 나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간혹 스스로 질문해보게 되는데 과연 내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것에 대해서였다.
많은 교육 현장에 계시는 분들을 보며 나름 느끼고 배운 것들도 많지만, 내가 가르치고 있는 이것은 학문이라 하기엔 다소 부족할 수도 있고, 어떠한 형태로 집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는 트레이너, 인스트럭터, 티처라는 다양한 의미로서 각자가 정의하고 있는 모습을 실현하며 살아나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그 가르침의 현장에서 우리는 학생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는 또 하나의 학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선생님 중 한 분은 티처와 인스트럭터를 이렇게 구분하셨는데, 문을 열고 나갈 때 무언가를 가지고 나가게 해주는 것이 티처라고, 인스트럭터라고 하는 것을 말 그대로 인스트럭션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한동안 그 의미가 많은 모티브가 되어 늘 한가지의 가르침을, 한가지의 무언가를 주기 위해 노력했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프로세스 자체가 매시간 나를 더 강하고 생각하는 선생님으로 만들었더랬다. 어찌 보면 그 과정 자체가 배움의 과정이었고 매시간 티칭을 하는 시간이 결국 수련이 시간이었다는 것을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오히려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 더 성심을 다한 한 시간, (혹은 몇 시간 씩)을 보내려 한다. 채우기보다 비우는 티칭을 선호하고, 주입식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티칭해 나가려고 노력한다.
이전에는 필라테스를 이렇게 라고 내 나름대로 정의하고 판단해서 이건 이렇게였다면, 지금은 이것도 저것도 괜찮지만, 그 선택의 결론에 회원 스스로 생각하는 프로세스가 꼭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원에게 생각의 프로세스가 보인다면, 나는 나의 티칭을 다시 reflection하고 그 자체가 성찰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게 조금 더 내가 지향하는 티칭이고 당장은 1~10까지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facilitator로서 어쩌면 마라톤을 같이 뛰어주는 조력자로서 함께 하고 싶다는 나의 교육철학이 확고해 진 것이다.
결국 이런 나의 철학은 손님을 가르칠 때나 선생님을 양성할 때도 마찬가지가 되었고, 그런 내 방법이 혹자에게는 느린 걸음처럼 느껴져 떠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 오늘 이 자리까지 나와 함께 발걸음을 하는 제자도 남아있다.
나의 또 다른 선생님 중 한 분께서 본인의 가장 애제자는 지금 현재 옆에 남아 있는 제자라고 하였던 지나간 기억이 떠오른다. 너무나 맞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 그 선생님도 참 외로운, 누군가에게 주는 삶을 오랫동안 살고 계셨던 게 아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게 되는 전제조건 중의 하나가 본인 스스로가 변화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실행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기부여와 나의 노력이 만날 때 그 결과가 빚어서 나오게 된다. 어찌 보면 그 동기부여가 내가 가진 능력보다 훨씬 중요하고 그것을 실행해 내는 행동력을 보게 될 때 기적적인 결과도 간혹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무언가를 가르치고 누군가에게 영감 혹은 귀감이 되고, 나의 개똥철학을 읊어도 하나부터 열까지 받아줄 수 있는 제자가 있다는 건 참으로 복 받은 일이다. 그들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한 번 더 움직이고 한 번 더 배우고 읽고 읊조리며 긴장을 놓지 않는 꾸준한 인생을 찾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조절하는 조절력도 가지게 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사이 교육이나 우리가 하는 일이 너무나 서비스 형태를 띄고 있어서 과연 어떠한 철학을 읊조리는 것 자체, 기본적인 예의와 관계에 대해 코멘트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고리타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진정한 배움이란 내가 가진 태도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배운 걸 써먹을 일이지 적어도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를 확인 받으려고 질문하지 않고, 배움 그 자체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알고 있던 확인 하고 싶었던 답을 얻었다면 주저할지 말고 나아갈 것이요, 그 확신을 두텁게 하기 위해 계속 연습하는데 매진할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배움이라는 것을 했다고 한다면 이미 답은 알고 있을 노릇이니 그걸 실천해 나가는데 좋은 스승이 곁에 있어준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축복된 일이기에, 그 고픔이 나에게는 적어도 너무 크기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을 오늘 글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밤, 더 주고 싶어도 못 주었던 제자들에게, 늘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많은 클라이언트들에게 또 많은 스승님께, 항상 동기부여가 되어주는 많은 친구, 지금 이 글을 감수해서 올려주는 나의 no.1 에게도 오늘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written by Kyung Hye, Sinclair